웃어 봅시다 by fanifafa

<object wmode="transparent" width="400" height="345" classid="clsid:d27cdb6e-ae6d-11cf-96b8-444553540000" codebase="http://fpdownload.macromedia.com/pub/shockwave/cabs/flash/swflash.cab#version=9,0,28,0" id="V000309887"><param name="movie" value="http://play.tagstory.com/player/TS00@V000309887@S000000001" /><param name="allowScriptAccess" value="always" /><param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 /><param name="quality" value="high" /><embed src="http://play.tagstory.com/player/TS00@V000309887@S000000001" width="400" height="345" name="V000309887"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quality="high"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pluginspage="http://www.macromedia.com/go/getflashplayer"></embed></object>


연필의 역사 = 파버 카스텔(Faber Castell)이 걸어온 길 by fanifafa

연필의 역사 = 파버 카스텔(Faber Castell)이 걸어온 길
예술가들에게 생각의 창이 되어준 연필 한 자루
독일에는 유난히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필기구 명가들이 많다. 오늘의 주인공인 파버 카스텔(Faber Castell)은 가장 긴 역사를 가진 필기구 브랜드 중 하나로써 1761년에 설립되어 247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라미(Lamy)는 1830년, 그리고, 스테들러(Staedtler)는 1835에 설립되었으며, 또다른 브랜드, 펠리칸(Pelikan)은 1838년에 설립되었다. 고급 만년필을 생산하는 몽블랑(Monblanc)은 1906에 실립되었고, 비교적 최근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로트링(Rotring)조차 1928년에 설립되어 8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 파버 카스텔 공장(좌), 초창기 파버 카스텔(우)
샤프의 등장 이후, 그 다음에는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연필과 같은 필기구가 예전만큼 큰 사랑을 받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여전히 매우 중요하거나 정성을 가득 담아야 하는 문서는 펜으로 작성된다. 자판기로 두드려서 쓰여진 디지털 문서는 하드웨어 사양이 바뀌면 불과 10년만에라도 아예 열어볼 수 없는 경우가 있지만 하얀 종이 위에 쓰여진 글씨는 수십년, 수백년은 너끈히 견디며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연필은 흑연이 종이 위에 새겨서 흔적을 남기고, 지우개로 지우면서 영원히 기억해야 할 추억을 담아낸다. 파버 카스텔(www.faber-castell.com)은 바로 그러한 필기구의 역사를 만들어온 브랜드이다.
기본에 충실한 것이 오래 간다
옛 말에 '부자는 3대를 못간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파버 카스텔은 무려 8대에 거쳐 필기구 사업을 계속 해나가고 있다. 기업이 일정 궤도에 오르고 이익이 남기 시작하면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많은 기업들의 천편일률적인 패턴이라면 파버 카스텔은 미련하게도 한 우물만 파는 필기구 전문 브랜드이다.
▲ 삼나무롤러펜(좌), 트위스트펜슬/볼펜(우측 상단), 엠비션코코넛우드 시리즈(우측 하단)
한 자루의 연필로 시작해서 샤프, 볼펜, 만년필, 색연필 등 그들도 나름대로 사업 확장을 해왔으나 무언가 쓸 것에 관한 상품을 생산한다는 점은 매한가지이다. 최근에서야 화장품 산업(www.fc-cosmetics.de)에 손을 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으나 여전히 파버 카스텔 하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연필을 제조하는 회사이면서 가장 많은 종류의 연필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우리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다.
살아있는 연필의 역사
캐비닛 제조업을 했던 카스파르 파버(Kaspar Faber)가 독일 바이에른주의 작은 소도시, 슈타인에 파버 카스텔을 설립했을 때만 해도 흔하디 흔한 연필공장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4대째인 로타 존 파버 시대에 우리가 흔히 보는 육각형 연필을 처음으로 만들고, 연필에 브랜드를 적용함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열게 된다. 현재의 파버 카스텔이라는 이름은 1898년 바로니스 오틸리에 폰 파버와 알렉산더 카스텔 루덴한센 백작이 결혼하면서 확립되었고, 이 때부터 펜의 힘을 상징하는 '파이팅 나이트(Toumament of the jousting Pencil Knights)'가 로고로 사용된다. 1978년부터 현재까지도 파버 카스텔을 이끌고 있는 안톤 볼프강 그라 폰 파버 카스텔은 '그라폰 파버 카스텔(www.graf-von-faber-castell.com)'이라는 브랜드로 파버 카스텔의 브랜드 이름을 한 단계 끌어 올리며, '연필계의 빌 게이츠'라는 애칭을 갖게 된다.
▲ 그라폰 파버 카스텔 이 해의 펜(2004년~2008년)
표준을 만드는 기업이 승자
어떤 기업이든 남들에게는 없는 나만의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기업 생존의 이유를 증명할 수 있다. 긴 역사만큼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파버 카스텔은 1939년에 프랑스에서 들여온 흑연에 점토를 섞어서 구워내는 세라믹 연필심 기법을 도입했으며, 단단한 정도(H)와 진한 정도(B)에 따라 8B-7B-6B-5B-4B-3B-2B-B-F-HB-H-2H-3H-4H-5H-6H-7H-8H로 이어지는 연필심의 등급을 세계 최초로 고안해냈다.(결국 이것으로 카스텔가는 남작 작위를 받는다.) 흑연의 성질은 흑연과 점토의 비율에 따라 달라지는데, 흑연이 많이 들어간 연필심일수록 연한 속성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연필은 HB이지만 그림을 그릴 때처럼 섬세한 표현을 원하면 B연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19세기 중반에는 아예 연필을 파버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하니 파버 카스텔이 연필업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인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 "난 고흐가 썼던 연필을 써!"
▲ 순서대로 카스텔 9000, 점보그립2001, 알버트뒤러수채색연필, 연필파스텔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는 제품을 생산해온 파버 카스텔의 수많은 제품 가운데, 100년이 넘게 스테디셀러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카스텔 9000은 파버 카스텔을 대표하는 연필 가운데 하나이다. 이 연필이 널리 보급되면서 비로소 파버 카스텔을 상징하는 색상 역시 녹색으로 정의되게 된다. 카스텔 9000 연필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블로그 등을 통해서 자랑을 하곤 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고흐나 괴테, 귄터 그라스, 헤르만 헤세 등 위대한 예술가들이 이 연필을 애용했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디자이너는 파버 카스텔이 아니고서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카스텔 9000 한 자루를 손에 쥐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세계적인 걸작이 나올 것만 같다.
약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켜라
▲ 월든숲 프로젝트(Walden Woods Project) 지지하는 한정판 콜렉션
세상의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연필은 자연의 힘에 기댄 상품이다. 나무를 잘라야 하고, 흑연을 캐내야 한 자루의 연필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대중들은 질 좋은 종이를 원하면서도 기업들이 거대한 나무를 베어내는 것에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파버 카스텔은 아세톤으로 연필을 도색하던 다른 기업들에 비해 훨씬 일찍부터 친환경 수성페인트로 연필을 도색하기 시작했다. 또한, 2003년 1월에는 문구계 최초로 '지구촌 협약'에 가입하였고, 연필 생산을 위해 면적 1만 ha에 달하는 '파버 카스텔 소나무 숲'을 브라질 삼림지대에 별도로 보유하고 있다. 자연을 훼손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사업이지만 그를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이익을 역시 자연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친환경적인 기업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만능 시대의 아날로그 강자
파버 카스텔은 오늘도 전세계 15개 공장, 100여개 지점, 5,500여명의 직원들이 연간 18억개 이상의 연필을 생산하고 있다. 디지털이 세상을 지배한지 오래지만 전세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파버 카스텔의 연필로 문자를 익히고, 셈을 하고, 개인적인 일기를 쓴다. 요즘같은 시대에 어떻게 보면 하찮게 여겨질 수도 있으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연필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다시 연필을 찾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아무리 키보드와 타블렛이 대세여도 고흐가 밑그림을 그리고, 괴테가 단어 하나를 쓰고 지우던 연필만이 가진 손맛만은 기계가 쉽게 흉내낼 수 없기 때문이리라. 여기에 200년을 훌쩍 넘어 300년을 바라보는 세월의 힘까지 더해진다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다.
▲ 파버 카스텔 화장품 라인

웃기는 이야기 by fanifafa


Business fortunate by fanifafa

디자인이 톡톡…문구시장 쑥쑥


" layerWrite(txt); if( ns4 ) { doc_width=self.innerWidth; doc_height=self.innerHeight; } else { if( ie4 ) { doc_width=document.body.clientWidth; doc_height=document.body.clientHeight; } } disp(); } function drc_intel() { if( snow == 1 ) nd(); var linkpath = "http://ar.donga.com/RealMedia/ads/click_lx.ads/www.donga.com/fix/1492754823/x93/click_textover_060203/click.gif/64323733383038363433656664373530"; var imgpath = "/news/takeover/intel_20080.gif"; txt = "
" layerWrite(txt); if( ns4 ) { doc_width=self.innerWidth; doc_height=self.innerHeight; } else { if( ie4 ) { doc_width=document.body.clientWidth; doc_height=document.body.clientHeight; } } disp(); } function disp() { if( (ns4) || (ie4) ) { if( snow == 0 ) { x = event.x - ( width / 2 ); if( x < 0 ) x = event.x; if (x > 90) x = event.x - 180; if( x < 0 ) x = event.x; over.left = x + document.body.scrollLeft; y = event.y + height; if( y < doc_height ) over.top = event.y + 10 + document.body.scrollTop; else over.top = event.y - (height + 10) + document.body.scrollTop; showObject(over); snow = 1; } } } function layerWrite(txt) { if(ns4) { var lyr = document.overDiv.document lyr.write(txt) lyr.close() } else if( ie4 ) document.all["overDiv"].innerHTML = txt } function showObject(obj) { if( ns4 ) obj.visibility = "show" else if( ie4 ) obj.visibility = "visible" } function hideObject(obj) { if( ns4 ) obj.visibility = "hide" else if( ie4 ) obj.visibility = "hidden" } 《#질문
‘교보문고, 코즈니, 텐바이텐, 1300K, DCX
의 공통점은?’
#답변
‘서점 아닐까?’라고 답하면 당신은 구세대!
정답은 수천 가지 디자인 문구와 인테리어
소품을 파는 전문 유통점들이다.
대형서점 교보문고도 디자인 문구 브랜드를 대거 유치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공책 한 권에 1만 원이 넘는 것들도 있지만
톡톡 튀는 디자인 때문에 매장은 언제나
10∼30대 여성들로 북적인다.》
디자인 문구 소품을 모아 파는 유통업체들이 온·오프라인에서 성업 중이다. 톡톡 튀는 디자인, 다양한 유통망, 소비자의 기호가 맞아떨어지면서 ‘디자인 문구 시장’이 열리고 있다.
현재 디자인 문구 업체만 500여 개, 시장 규모도 1000억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 ‘20대가 만들고 20대가 판다’
서울 중구 명동 코즈니 매장을 찾는 고객은 하루 평균 2만여 명에 이른다. 화려하고 튀는 디자인에 끌려 지갑을 여는 여성 고객이 적지 않다.
전국에 매장 30여 개를 둔 코즈니는 올해 600억∼700억 원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온라인 디자인 문구 판매에 주력하던 텐바이텐도 서울 종로구 대학로와 서대문구 신촌점 등지에 10여 개 오프라인 점포를 내는 등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모닝글로리 아트박스 등이 이끌던 1990년대 팬시 문구 시장의 주 타깃이 10대 고객이라면 디자인 문구 시장은 20대 고객이 주축이다.
디자인 문구를 만들고 파는 사람들도 20대 때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디자인 문구 제조업체 밀리미터밀리그램(mmmg)의 배수열 대표는 25세이던 1999년 창업했고, 디자인 문구 유통전문점 텐바이텐도 이창우 대표 등 한양대 건축공학과 92학번 동기들이 28세이던 2001년에 만들었다.
mmmg의 배수열 대표는 “20대가 디자인하여 만들고, 20대가 팔고, 20대가 소비하는 시장을 새로 만든 셈”이라고 말했다.
○ 화가가 문구 디자이너로!

동양화가 육심원(32·여) 씨는 여성의 다양한 표정을 화사한 색채로 표현하는 젊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2004년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AM은 당시 무명이던 그에게 전시를 제안했다. 젊은 작가들을 발굴한다는 차원에서 기회를 준 것.
그런데 전시기간에 육 씨의 작품 카탈로그가 수천 부씩 팔리는 ‘이변’이 나타났다. 원본 그림은 못 사더라도 가까이 두고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였다.
갤러리 AM은 작년 9월부터 아예 다른 일은 제쳐두고 육 씨의 그림으로 아트문구를 만들고 있다.
육 씨는 “거리에서 내 그림이 담긴 수첩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면 마냥 즐겁다”며 “일본의 유명작가 나라 요시토모 씨처럼 대중과 함께하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디자인 문구 시장이 부상하면서 육 씨처럼 ‘실용적인 작가’를 표방하는 디자이너, 예술가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광고 디자인 회사 출신인 김한 씨는 2004년 디자인 문구업체 ‘7321’을 만들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다이어리가 10만 개 이상 팔리는 등 디자인 문구 시장의 가능성은 매우 밝다는 것이 김 씨의 설명.
배 대표는 “노트 하나도 디자인의 숨결을 담겠다는 일념으로 만들고 있다”며 “아직은 보잘것없는 시장 규모지만 소비자와 함께 무럭무럭 커가고 있어 미래는 밝다”고 했다.

산에서 찾은 안식처....... by fanifafa

[산에서 찾은 안식처]

By Amy Shipley
Washington Post Staff Writer

Friday, December 24, 2004; Page D01


토비 S.C. 도슨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미들네임 SC가 ‘넘 멋져(So Cool)'를 뜻한다고
말하곤 했다. 비록 그 자신은 그런 의미와는 전혀 달랐지만.
도슨은 아주 내성적이었다. 그는 소심했으며 사람들을 피했다. 자신조차도.

SC는 그가 아기였을 때 6개월간 머물던 한국의 고아원에서 붙여진 이름 수철의
이니셜이다. 세살도 되기 전 그는 부산의 한 파출소 문 앞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그리고 일년이 채 못 되어 그는 미국인 스키강사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그리고
양부모는 그를 눈 덮인 콜로라도의 베일시로 데려와 새 인생을 맞게 해 주었다.

미국에 도착한 후 몇 달 동안 토비는 마루바닥의 양탄자에서 엄마와 함께만 잠을 잤다.
그는 자기 방 벙커침대를 무서워했다. 매일 밤 그는 잠에서 깨어나 ‘umma’ 하고 외치면서
울어댔다. umma는 한국말로 엄마라는 뜻이다. 욕탕에도 혼자 들어가는 걸 무서워해서 꼭
아빠와 함께 목욕을 했다. 부모들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부서지기 쉬운, 겁 많은 아이였다.
스키를 신었을 때만 제외하면.

아이를 데려온 바로 다음 날 마이크 도슨은 아이를 가슴에 묶고 슬로프를 탔다.
‘그는 바람 속으로 얼굴을 내밀었죠.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마이크는 그 때를 회상했다.
22년 후, 이제 26살의 토비도슨은 프리스타일 모굴 스키 분야에서 세계적인 선수로
알려져 있다. 그 분야는 어쩌면 그와 걸맞게도 수 없이 많은 방해물 위를 멋진
스타일과 폼으로 달려야 하는 극한적인 기술을 요하는 스포츠이다. 그것은 토비가
스키와 인생을 통하여 극복해야 했던 것들과도 흡사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아주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해 월드컵 종합랭킹 2등에
올랐고 금년 시즌을 넘버 2로 시작하는 도슨의 말이다.
‘그리고 그 행운을 앞으로도 계속 주울 계획입니다.’

덴버의 입양기관을 통해 입양한 김수철이 보호자의 손에 이끌려 덴버 공항에 내린
82년 3월까지 양부모가 소년에 대해 아는 정보는 그가 밥과 과자를 좋아하고 잠을
잘 자며 다른 아이들과 잘 논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수철의 사진 한 장만 달랑
볼 수 있었다. 심각한 표정에 박박 깎은 머리.. 앞으로 삐져나온 귀.. 너무 커서 걷어 올린
바지..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 그가 경찰서 앞에 버려졌다는 사실 이외에 그들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입양 첫 해엔 천천히 아이가 적응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데보라 도슨은
아들에게 전념하기 위해 그녀가 맡고 있던 스키 강사일도 그만 두었다.
양부모는 수철의 입양 일년 후 아들이 마음으로 의지할 수 있도록 또 한 명의
한국 소년 KC를 입양했다.

사람들을 싫어하고 엄마에게만 매달리는 토비와는 달리 KC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토비는 프리스쿨 첫 등교 날 교실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부모는
그를 강제로 떠밀지 않고 동네 어떤 여인이 경영하는 작은 유치원에 보내주었다.
‘그는 아주 아주 부끄럼을 많이 탔습니다.’ 2001년에 마이크와 이혼한 데보라의 말이다.
‘걔가 좀 자라면서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죠. 토비 제발 사람들 눈을 쳐다보고
핼로라는 말 한 마디만 하렴. 그게 예의야. 그 담엔 아무 말 안 해도 좋아.‘

자신의 배경에 대해 알게 되면서 토비의 대인기피증은 심해져 갔다.
초등학교 체조 시간에 어떤 아이가 그에게 인종차별적 욕을 했다. 그는 부모에게
그 수업에 절대 안 들어가겠다고 말하곤 정말로 가지 않았다. 좀 더 나이가 든
후에도 동네 가게에서 무언가 주인에게 말했다가 사람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는 것을
느낀 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어느 시점에선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고 난 후엔 거의 심할
정도로 소극적이 되었습니다.‘ 12월 16일 프랑스 월드컵에서 7위로 입상하기 직전
콜로라도 월프크릭에서 연습 중이던 토비와의 통화에서 그가 한 말이다.
‘그 후론 사람들이 모두 나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가정하게 되더군요.’

‘난 나의 한국 뿌리에 대해선 아무 관심도 없었어요. 난 그저 평범한 아이이고 싶었죠.
친구들은 모두 금발에 푸른 눈을 하고 있었어요. 그게 내가 바란 전부였죠.. 그저 그들과
똑같고 싶다는..‘

베일의 산에만 오르면 그는 전혀 남들과 똑같지 않았다. 네 살 되던 해 그는 작은 스키를
타고 엄마와 함께 슬로프를 내려오곤 했다. 그들은 일주일에 4, 5일을 온 종일 스키만
탔다. 6살 때 이미 알파인 경기에 참가했고 아빠와 함께 당시 스키 스타였던 필과 스티브
메어 형제의 월드컵 경기를 참관하였다.

‘전 스키를 정말 좋아했어요. 아무리 해도 지겹지 않았죠. 그저 슬로프에 남아
타고 타고 또 타고 싶었어요.‘ 토비의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단순히 슬로프를 내려오는 것 보다는 집 주위의 언덕을 탐험하며
각종 묘기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에 더욱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9살 즈음엔 이미 5,6 미터의 절벽을 뛰어 넘어 그 아래 슬로프로 점프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면 근처의 리프트를 오르던 스키어들이 환호하며 휘파람을 불어주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느낌이었죠. 그 무중력의 느낌이 정말 좋았어요.’

360도 회전과 백플립(뒤로 한바퀴 도는)을 시작할 즈음 그의 엄마는 검은 헬멧과
얼굴 마스크를 착용할 것을 강요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런 보호장비를 착용한
소년은 주위에 그밖에 없었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처럼 스키 신고 날아다니는 소년도
없었다.
‘엄마는 내가 나무에 부딪치거나 바보 같은 짓을 할까봐 너무 겁나 하셨죠.
난 항상 나무들 사이를 무지 빠르게 날거나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무모한 짓을
했습니다. 마치 내겐 이중적인 인격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열 서너 살 무렵 그는 동네 프리스타일 스키 프로그램 여러 곳에 등록했다.
‘그는 대단한 스키어였습니다.’ 당시 그를 가르친 마이크 클로서 코치의 말이다.
‘정말로 재능이 넘쳤죠. 어떤 자세에서도 항상 스키로 떨어지는 능력을 가졌더군요.’

토비는 18세에 처음으로 미국 대표로 뽑혀 1999년 월드컵 경기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그가 미국 국가대표로서 마음이 편해진 건 몇 년이 지난
뒤라고 한다.
그러한 불안감은 경기력(racing) 하고는 상관없었다.
언제나처럼 불안감은 그의 피부색(race)과 관련 있었다.
얼마 동안 그는 국가대표 자리를 노리는 다른 소년들이 그를 싫어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자기들의 기회를 앗아간 외국인 침입자라는 표정으로.
‘난 이제 백프로 미국인이라고 느껴집니다.’ 토비는 말한다.
‘하지만 이전엔 그런 생각들이 항상 머릿속을 맴돌았죠.’
그런 목소리는 실제였을까, 아니면 그가 상상한 것일까? 지금까지도 도슨은 그러한
불편함이 다른 사람의 인식(편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의 인식이 자신의 불편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마음의 혼란과 답답함을 달래주기
위해 도슨 부부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하나의 문화뿐만 아니라 두 가지 문화를 모두 맛
볼 수 있도록 개방시켜 주었다.
‘우린 아이들에게 너희들 뿌리를 잊지 말라고 일러주었죠.’ 아버지의 말이다.
‘너희들은 이곳과 한국에 두 개의 뿌리가 있노라고.’

가족들은 종종 덴버의 한국 가게에 들러 아이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가득 사곤 했다.
김치, 라면, 김, 그리고 무엇이든 매운 것들을. 그들은 입양 단체에서 주선하는 한국
입양아들의 모임에도 참가하고 토비가 일곱 되던 해에는 한국 아이들로만 생일 파티를
열어주었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과거 이야기를 서류와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러나 토비는 그런 대화를 자꾸 피하려 했다.
‘KC는 항상 입양에 대한 얘기를 듣기를 원했어요.’ 엄마의 말이다.
‘그러나 토비는 항상 “엄마 이제 그만하면 안 되나요?”라고 말했죠.’

최근에 토비는 한국에 몇 차례 다녀왔다. 그리고 이제야 그가 외면하려던 일들을
감싸 안기 시작했노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어도 좀 배웠고 언젠가는 유창하게
말하고 싶다고도 말한다. 그는 한국 입양가족 캠프에서 카운슬러 일을 맡아 아이들이
그가 예전에 똑같이 느꼈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그는 아직도 본능적으로 수줍음이 많고, 모르는 사람이 먼저 말을
걸기 전엔 간단한 대화도 다른 사람에게 먼저 트지 못한다고 한다.
그는 아직 말 보다는 스키로 대화하는 것이 편하다. 지난해엔 제레미 블룸을
제치고 미국 최고의 모굴 스키어가 되었다. 2003년 시즌 월드컵 스키에서 두 개의
동메달을 딴 이후 지난해엔 드디어 핀란드의 영웅 라텔라에 이어 세계 랭킹 2위에
오른 것이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 동계 올림픽 대표 자격을 아슬아슬하게 놓친 그는 이제 튜린에서
열리는 2006년 동계 올림픽에 목표를 두고 있다고 했다.

이제 그가 미국 올림픽 팀에 합류한다면 그의 말마따나 그의 인생 역전은 동화의 한
챕터가 될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 사례로서.

그는 말한다.
‘아마 그때엔 내가 온 세상에서 가장 행운의 사나이라고 느껴질 것입니다.’

(끝)


---------------------------------
At Home On the Mountain
Born in S. Korea, Adopted at 3, Dawson Found Confidence and Calling on Slopes

By Amy Shipley
Washington Post Staff Writer

Friday, December 24, 2004; Page D01

Toby S.C. Dawson used to tell friends his middle initials stood for "So Cool," although he was anything but. Dawson was shy. He was wary. He was hiding, even from himself.

The S.C. stood for Soo Chul, the name he had been given at the South Korean orphanage where he spent six months as a toddler. At less than 3 years old, he had been abandoned on the doorstep of a police station in Pusan, in the far south of the country. Less than a year later, he was adopted by a pair of American ski instructors, who brought him to a new life in the snow-covered mountains of Vail, Colo.

In the months after he arrived, Toby slept beside his new mother on a quilt on the floor, afraid of the bunk bed in his room. He woke up crying every night, screaming out "umma," the Korean word for Mommy. He bathed with his father, unwilling to go into the tub alone. He was, his parents Mike and Deborah Dawson recalled, a fragile, fearful child.

Except when he got on skis.

Mike Dawson strapped his son onto his chest a day after bringing him home and the pair hit the slopes.
"He put his face out into the wind, and he loved it," Mike recalled.

Twenty-two years later, Toby Dawson, 26, is considered one of the top athletes in the world in freestyle moguls skiing -- an event that, perhaps fittingly, involves skiing with style, flair and extreme skill over lots of bumps, which is essentially what Toby Dawson has mastered in sport and life.
"Right now, I really feel I have been very lucky," said Dawson, who finished second in last year's overall World Cup standings and began this season ranked No. 2. "And I'll keep taking the luck."

Before Kim Soo Chul walked off the plane holding the hand of an escort at Denver's old Stapleton Airport in March 1982, the only thing the Dawsons knew about the boy they had adopted through a Denver agency was that he liked rice and cookies, slept well and played nicely with other children. They had seen just one photo of Soo Chul, a shot of a serious boy with closely shaved hair, protruding ears, rolled-up pants and mismatched clothes. Other than his being left at the police station, they knew nothing else about him.

They coaxed him gently through his first years in Vail, allowing him to set the pace of his adaptation. Deborah Dawson quit her job teaching skiing to give her son her full attention. She and her husband adopted another Korean boy, K.C., a year after Toby's arrival to provide him with a companion and soulmate.

K.C. had a vivacious personality, unlike Toby, who disdained crowds and clung to his mother. He refused to enter the classroom on his first day of preschool; his parents didn't force the issue, enrolling him instead in a small program organized by a woman in the neighborhood.

"He was very, very shy," said Deborah Dawson, who was divorced from Mike Dawson in 2001. "I remember, as he got older, I used to tell him, 'Toby, all you have to do is look someone in the eye and say hello. That's polite. After that, you don't have to talk.' "

Toby Dawson became more introverted as he developed an awareness of his background. During an early gymnastics class, another gymnast referred to him using a racial slur. Toby told his parents he would never return to the class, and he didn't. When he was older, he recalled requesting something at a grocery store, and drawing stares. He decided, after that, it was safer to be silent than to speak.
"At a certain point, after you hear a couple of people say something, you get almost extra defensive," said Toby Dawson, speaking by phone from a freestyle skiing camp in Wolf Creek, Colo., days before finishing seventh in his season-opening World Cup race in Tignes, France, on Dec. 16. "You automatically assume that everyone is talking about you.

"I wasn't interested at all [in my Korean heritage]. I just wanted to be a normal kid. All my friends had blond hair and blue eyes. That's what I wanted. . . . I wanted to be the same."

He was not the same in the mountains of Vail. By the time he turned 4, he was sliding down small slopes on miniature skis, his mother pulling him along. The pair went out four or five days a week, skiing all day. He began entering alpine races at age 6, and he recalled watching former U.S. stars Phil and Steve Mahre compete in World Cups at Vail with his father.

"I remember loving skiing," Toby said. "I couldn't get enough. . . . I just wanted to stay out there and keep making runs and runs and runs."

Even so, sliding straight down mountains did not interest him nearly as much as his explorations of the ski areas around his parents' home, which introduced him to the pleasures and rewards of stunts. At perhaps 9, he recalled, he loved to careen off a certain cliff some 20 feet high, soaring to the run below as skiers riding a nearby chair lift hooted and whistled approval.

"It was that feeling of dropping out of the sky," Toby said. "I started to enjoy that weightless feeling."

Once he started doing 360s and backflips, his mother insisted that he wear a black helmet with a face mask. He recalled being the only kid in Vail required to take such precautions, but then again, few flew quite like he did.
"She was so worried I would hit a tree or do something stupid," Toby Dawson said. "I was always skying through trees really fast and jumping off cliffs and being reckless. It was almost like I had a split personality."

In his early teens, he entered a number of local freestyle skiing programs. "He was a phenomenal skier," said Mike Kloser, the coach at one of them. He was "loaded with talent. . . . He would always seem to find the ground with his skis first."

Toby qualified for his first U.S. team at 18 and competed in his first World Cup event in 1999, but, he said, it took years to feel comfortable wearing red, white and blue. He said his misgivings had nothing to do with racing; as usual, the anxiety was tied to his race. For a while, he said, he sensed other kids seeking national team spots resented him, viewing him as a foreign invader depriving them of an opportunity.
"I feel 100 percent American now," Toby said. "But before, those were the kinds of ideas that were floating through my head."

Were those voices real or imagined? To this day, Toby Dawson said, he isn't sure whether his discomfort grew out of others' perceptions or whether his perceptions grew out of his own discomfort. Hoping to smooth over such confusion and frustration, the Dawsons had tried to be open with their sons about their backgrounds, immersing them in not one, but two cultures, as they grew up.
"We told them, 'Don't forget your roots,' " Mike Dawson said. "You have two roots: here and in Korea."

The family traveled occasionally to a Korean market in Denver, loading up on foods their sons devoured: kimchee, noodles, seaweed, anything spicy. They attended gatherings of Korean children through their adoption agency and even threw Toby an all-Korean birthday party when he turned 7. The Dawsons told their sons as much as they knew about their pasts, showing them documents and photos.
Toby, however, generally wriggled out of such conversations.
"K.C. always wanted to be told about his adoption," Deborah Dawson said. "Toby always would say, 'Mommy, can we be done now?' "

In recent years, Toby Dawson has made a number of trips to South Korea and, he said, he has begun to embrace the very things he used to rebuff. He said he has studied the language a little, and hopes to become fluent someday. He is a counselor at the Korean Heritage Camp for Adoptive Families, eager to ease the transitions of kids facing the same issues he did.

He remains, he said, instinctively shy, not likely to make small talk with a stranger unless the stranger speaks up first. He continues to communicate best through his skiing, last year surpassing Jeremy Bloom as the top U.S. moguls skier. That season, a year after winning two bronze medals at the world championships in 2003, he finished in the overall World Cup standings behind only Finnish great Janne Lahtela.
Having narrowly missed qualification for the 2002 Winter Games in Salt Lake City, Toby Dawson said, he has his sights firmly on the 2006 Winter Games in Turin.

Making the U.S. Olympic team, he said, would turn his life story into a fairy tale, a hard-to-believe realization of the American dream.
"I would just feel," he said, "like one of the most fortunate people in the world."

1 2 3 4